
♧ 2024년 11월 소식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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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2024.12.24 | 작성자 : 전희자 | 조회 : 26 |
24년 11월 소식지.hwp | |
사랑터 회원여러분 안녕하셨습니까 ? 2024년 11월입니다. 최근 우리나라는 극심한 정치적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합치와 통합의 정치는 없어 졌고 여야가 극한의 대치와 대립으로 상생의 정치 모습은 볼 수가 없습니다. 아시아의 필리핀에 국민의 존경을 받던 전 대통령 막사이사이를 소개하겠습니다. 국민의 존경을 받던 막사이사이 대통령이 사고로 사망하자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 마르코스는 부정과 부패로 필리핀을 나락으로 떨어트려서 이제는 가난한 나라가 되어 여성들을 다른 나라에 가정부로 수출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라몬 막사이사이(1907년8월 31일~1957년3월 17일)는 필리핀의 독립운동가 이자 정치인입니다. 필리핀의 제7대 대통령이자 필리핀 제3공화국의 제3대 대통령입니다. 고학으로 호세 리살 대학과 필리핀 공과 대학을 마치고 제2차 세계 대전 중 게릴라를 이끌고 일본과 싸웠으며 2차 대전 종전 후에는 국방장관을 거쳐 1953년 대통령이 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의 후크발라합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하고 내란을 수습하여 유명해졌다. 대통령 임기 중 막사이사이는 그의 가족 및 측근에게 어떠한 혜택도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도로, 다리, 및 건물 등이 자신의 이름을 따라 호명되는 것을 허락지 않았습니다. 또한 대통령의 의전 특권을 반납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막사이사이는 1907년 8월 31일 필리핀 루손섬 이바에서 엑스큐엘 막사이사이의 여섯 남매 가운데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엄격한 교육관을 가진 전문학교 기술 선생이었으며, 어머니는 독실한 로마 가톨릭교회 교인이었습니다. 막사이사이는 독실한 로마 가톨릭 교인인 부모의 영향을 받았고, 아버지의 엄격한 교육과 어머니의로마 가톨릭교회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호세 리살 대학교 경영학과를 다니던 시절 하숙집 주인의 운전사로 일하며 공부했습니다. 그 뒤 자동차 운전사를 하면서 야간반으로 1932년 필리핀 대학교를 졸업한 막사이사이는 1933년에 버스 정비 노동자로 일하고 있을 때 루즈반존과 결혼했습니다. 버스회사에서 정비사로 근무하며, 대학교재학시 만난 부인과 아이들을 부양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초반부터 미국 군대와 함께 항일 투쟁을 하였습니다. 항일 게릴라 활동으로 명성을 쌓아 종전 직전에는 게릴라의 지휘관으로까지 승진했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고향인 잠발레스주의 군정 장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1946 자유당 소속 하원의원에 당선, 하원의 국방위원장에 선출되었습니다. 1950년 퀴리노 행정부의 국방부 장관이 되어 공산주의 게릴라인 후크발라합에게 항복하면 생계를 보장해 주는 유화 정책과 강경 진압 정책을 사용하여 진압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귀순자들에게는 토지와 농기구를 마련해주고 정부군에게는 국민들을 무시하지 말고 정중하게 대하도록 주장했다. 또한 군대를 개혁하여 부패하고 무능한 장교들을 해임하고 게릴라와의 전투에서는 기동성과 유연성을 강조했습니다. 1953년 국민회의당에 입당하여 동년 4월 대통령 후보자로 출마, "내가 먹기 전에 국민이 먹어야 한다. 나의 부친이라도 범법하면 감옥에 보내겠다" 등의 요지로 유세 11월 2대 1이란 큰 차로 필리핀 공화국 제3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는 대통령이 된 뒤에도 의전상의 예우를 간소화하는 등 서민 대통령으로 알려졌습니다. 취임 직후 그는 토지 분배를 비롯하여 학교 건설 및 부정으로부터의 국민 보호를 실천함으로써 국민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었습니다. 막사이사이의 정책은 또한 서민과 빈곤자들을 위한 정책이었다. 그래서 빈민가에 사는 빈민들은 그를 "진정한 사나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그는 필리핀 빈민가 및 낙후한 지방에 공동 우물을 설치하여 가난한 이들이 이용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그 우물을 "막사이사이 우물"이라 부른답니다. 한편 대외적으로 막사이사이는미국을 우방으로 하는 정책을 고수하고, 동남아시아 조약기구의 설립에도 관심을 보여, 1954년에 마닐라에서 창설된 동남아시아 조약기구(SAETO)에 가입했습니다. 그러나 1957년 3월 필리핀 남부 세부(Cebu)섬의 대학에서 연설을 끝마친 후, 비행기편으로 출발 마닐라로 돌아오던 중 기상이 악화, 비행기 추락사고로 수행관리들과 함께 밀림에 추락, 사망했습니다. 향년 50세. 1958년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막사이사이상이 제정되었습니다. 유산으로는 생명 보험 증권 1매와 마닐라 교외에 제2차 대전 전에 지은 보잘 것 없는 가옥이 전부라서 생전의 청렴함에 국민들을 감동시켰습니다. 필리핀 국민의 지지를 받던 막사이사이 대통령이 사망을 필리핀 국민들이 몹시 아쉬워하며 슬픔에 젖었습니다. 우리 나라도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어 줄 지도자가 나오기를 기원합니다. 필리핀 세부를 다녀온지 8년이 되었습니다. 그때 현지에서 만나본 필리핀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대한민국은 좋은 지도자를 만나서 발전을 했고 필리핀은 마르코스라는 부패정치인을 만나 후진국으로 되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나라도 민의를 받들어 국가를 발전시키는 지도자를 뽑아야 우리 후손들이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 것입니다. 살기 좋은 나라 선진화된 대한민국을 만드는 일에 사랑터 회원님들 모두 관심을 갖고 투표에 임하시고 정치에 관심을 가져주시기 바랍니다. 사랑터 이 명 우 ※ 자료를 네이버 와 구글에서 검색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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